파산마을 표지석 : 2005년 파산동에서 호산동으로 변경되면서 마을 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파산마을 표지석'을 세웠다.
대구 달서구 호산동.
고층 빌딩과 대형 대학병원이 즐비한 이 현대적인 도심 한복판에 800년의 역사를 품은 ‘시간의 섬’이 있다. 2011년, 기업인들이 기피하는 단어인 ‘파산(破産)’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지명은 ‘호산동’으로 바뀌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마을 입구에 커다란 ‘파산마을’ 표지석을 세우고 옛 이름을 지키고 있다.
낙선재(樂仙齋) : 1860년경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을 추모하기 위하여 묘소가 있는 파산(巴山) 아래에 건립한 재실
호산동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화려한 도심의 소음은 이내 잦아들고 고즈넉한 재실이 취재진을 맞이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은 낙선재(樂仙齋)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자 대구의 대표적 유학자인 낙재(樂齋) 서사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약 150여 년 전부터 산소를 관리하고 글을 가르치던 서당 역할을 해왔다.
후손 서상교 씨는 “낙재 할아버님께서 임금님께 하사받은 산에 안장되신 후, 그 맥을 잇기 위해 세워진 곳”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경모재 (景慕齎) : 순천김씨 횡성공파 호산종친회 재실. 선조들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경모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순천 김씨 문중의 경모재와 시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이 깃든 효부각 또한 호산동이 단순한 법정동이 아닌, 깊은 뿌리를 가진 공동체임을 증명한다. 마을 주민들은 개발의 물결 속에서도 선조들의 뜻이 담긴 이 건축물들을 정성스레 보존하며 마을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산호경로당 인근에는 두 개의 애향비가 나란히 서 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 당시 안골물을 막아 상하수도를 정비하고 마을 길을 닦았던 고(故) 김찬수 선생,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후 고향의 발전을 위해 큰 뜻을 보탰던 단양 우석주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다.
김동우 호산발전협의회 고문은 “이 비석들은 우리 동네 이름이 역사 속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고집스러운 마음의 결과물”이라며, “후손들이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끝까지 전하겠다”고 말했다.
마을 초입에는 마을을 위해 뜻을 보탰던 마음을 기리는 '애향비'가 있다.
하지만 마을의 모든 흔적이 온전히 보존된 것은 아니다. 호산동 주민들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바로 ‘당산나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어 300년 넘게 마을의 안녕을 지켜온 소나무가 지난 2011년 재선충병 감염을 이유로 무참히 베어졌다.
당시 행정기관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했으나, 주민들은 제대로 된 안내나 예방 노력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벌목에 강하게 반발했다. 사유지 개발을 위한 의혹까지 제기될 정도로 당산나무의 상실은 마을 공동체에 큰 상처를 남겼다. 지금은 그루터기조차 찾기 힘든 흔적만 남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마을의 수호신을 잃은 슬픔을 토로한다.
300여 년 넘게 마을을 지켜온 당산나무의 예전모습(왼쪽. 사진제공=달서구청)과 벌목 후 흔적만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오른쪽)
호산동은 지금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대학병원과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며 생활환경은 달라졌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주민들은 마을의 옛 기록을 수집하고, 비석을 닦으며 ‘파산’이라는 옛 이름을 놓지 않는다.
고층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로 보이는 낡은 기와지붕과 정갈한 비석들은 이곳이 단순히 ‘살기 편리한 동네’를 넘어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터전’임을 말해주고 있다.
사라진 당산나무에 대한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호산동 주민들은 오늘도 낙선재와 경모재의 문을 연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800년의 맥을 이어가는 파산마을의 고집스러운 보존 노력은, 효율성만을 따지는 현대 사회에 ‘고향의 가치’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