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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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2. 효열부 전의이씨 이신옥, 절명사비(1)
1) 프롤로그예나 지금이나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는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도 있지만 때론 끔찍한 사랑도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사랑과 영혼[고스트·1990]’이란 영화가 있었다. 비명에 세상을 먼저 떠난 남친의 영혼이, 세상에 남아 있는 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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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1. 현풍 사직단 → 일제 신사 → 달성 충혼탑
1) 프롤로그지금의 달성군 현풍읍 부리(釜里)와 상리(上里) 일원은 조선시대 현풍현의 중심이었다. 현풍현 읍치였던 만큼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현풍현 주요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지금의 현풍읍 행정복지센터와 현풍초등학교 일대였다. 이 지역 북쪽은 비슬산 서쪽 자락이, 동쪽과 서쪽은 두 개의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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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0.성서 신당동 김령김씨 모암재와 오정동
1) 프롤로그지금으로부터 565년 전인 1456년(세조 2) 음력 6월. 조선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던 것. 사건 발생 5일 만에 무려 120여 명이 처형당했다. 그 중 사육신을 포함한 주동자들은 정말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거열형으로 육체는 갈가리 찢겨졌고, 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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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9. 유가사 범종루 불전사물(佛殿四物)
1) 프롤로그비슬산 유가사는 대웅전에 이르기 전까지 모두 네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제일 먼저 일주문을 통과하고, 이어 천왕문과 시방루를 통과해야 비로소 대웅전 뜰에 오를 수 있다. 범종루와 시방루는 누문으로 2층은 마루, 1층은 출입문이다. 이중 범종루는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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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8. 부용당·임하처사 두 선조를 기리는 부림정
1) 프롤로그 7·8월 무더위가 시작되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꽃나무가 있다. 장마가 끝나고 태양 볕이 따가워지기 시작할 무렵 피기 시작해, 여름 석 달 동안 만개하는 배롱나무 꽃이다. 우리 고장에서 가장 멋진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는 곳을 한 곳 꼽으라면 단연 달성 하목정이다. 지금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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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7. 친정 곳에 묻힌 ‘미성부’ 박씨 자매
1) 프롤로그이번에는 미리 예고한 것처럼 혼례를 치룬 ‘유부녀’임에도 시댁이 아닌 친정 곳에 묻힌 박씨 자매 묘소에 대한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혼례를 치룬 여인은 시댁 쪽에서 장례와 제사를 지낸다. ‘시집간 여자는 죽어서도 시댁귀신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세상이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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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6. 마천고개 열부 창녕성씨 정려각
1) 프롤로그이번에도 우리 고장에 있는 한 정려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다사읍 이천리와 하빈면 현내리를 잇는 마천고개[마천령]. 이천삼거리에서 현내리 방향으로 마천고개를 550m쯤 가다보면 우측에 정려각 한 동이 있다. 이 길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이곳에 정려각이 있는지 잘 모른다. 주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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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5. 옥포읍 본리리 효자 김형규 정려각, ‘정효각’
1) 프롤로그지난주 옥포읍 기세리 진주강씨 모열각에 대해 알아보았다. 모열각은 일제에 의해 조선이란 나라가 사라진 뒤에 세워진 효부 비각이다. 그래서 모열각은 엄밀하게 말하면 정려각은 아니다. 다만 오륜행실중간소라는 유림단체의 공인을 얻었기에 나름 정려각에 상응하는 정도의 위상은 인정받았다고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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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4. ‘열부우’를 내렸다는 진주강씨 부인과 모열각
1) 프롤로그필자는 달성군 시티투어인 ‘참꽃투어’ 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올해는 5월 말부터 9월말까지 매주 토·일요일 한시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코스는 도동서원·비슬산자연휴양림·마비정벽화마을·남평문씨 인흥세거지·사문진 주막촌·송해공원 등으로 짜여 있다. 최근 송해공원 입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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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3. 죽곡리 모암봉 윷판형 암각화
1) 프롤로그 며칠 전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모암봉(196m)에 올랐다. 모암봉 정상 부근에 있다는 윷판형 암각화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암각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모암봉으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두 등산로 바닥 암석에 떡하니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내리는 누구라도 쉽게 보라는












